
초대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는 어떤 위치입니까? 안디옥 교회가 세워짐은 디아스포라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결과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 상황을 듣습니다. 이방인 중 믿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소식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새 신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바나바는 양육을 도모합니다. 그렇게 바나바가 데려온 인물이 바울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장 동력은 양과 질 모두를 아우른 결과입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복음화에 앞장섬은 당연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처음 전도자들을 파송할 때 장면을 보십시오. 안디옥 교회가 하나같이 금식하고 기도한 후 안수하고 파송합니다. 그렇게 바나바와 바울이 다녀간 전도 지역을 기억하십시오. 전도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안디옥 교회가 불안합니다. 알고 보니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데도 안디옥 교회를 가르치려 합니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러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가르침으로 인해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바울이 아니라고 완강하게 말하는데도 교인들은 엉거주춤합니다. 알고 보니 다름 아닌 구원론 과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전한 구원론은 할례였습니다.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말하며 모세가 전한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영적 권위를 말할 때 모세만큼 힘 있는 언어가 또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방인이 다수인 안디옥 교회는 난감해집니다. 바울은 분명 두 손을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선뜻 바울 편에 서질 못합니다. 엉거주춤한 성도들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더욱 목청을 높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모세라는 그 단어가 지닌 권위를 보십시오. 나름 탄탄하게 양육했다고 여겼는데 혼란스러워합니다. 잘못하다가는 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허튼소리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루살렘 교회 생각을 들어봄이 우선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사도들과 장로들 의견을 듣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합니다. 최초의 총회답게 주제는 구원론이었습니다. 여러 의견들이 오갔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정확한 진리를 채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사신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가 돌아옵니다. 그들이 편지를 읽어주며 안디옥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니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오직 진리만 전하고 가르쳤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랬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각할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다툽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복음을 전했던 교회들을 돌아보자며 싸웠습니다. 복음을 전했으니 돌봄 또한 소중한 과제입니다. 어떻게 양육과 돌봄이 불화를 일으킬 일입니까? 알고 보니 한 사람 마가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치를 떨면서까지 마가 요한을 냉정하게 내쳤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등을 돌려 갈라설 만큼 심각한 언쟁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전도 대열에서 이탈했던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극렬하게 반대하며 마가를 내쳤습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식으로 차갑게 대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마가 요한에게는 대못을 박는 일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 후 마가는 바울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겠습니까? 바울은 왜 이토록 매정하고 무서울 정도로 선을 그었습니까(행 15:38)? 과연 철부지 같던 마가 요한은 그 후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마가가 기록한 복음서를 살필 때 이 상황을 무시해도 괜찮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마가복음 기록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그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마가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 봄이 타당합니다. 문제는 어떻게든 마가가 의식할 수밖에 없는 바울의 복음입니다. 바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간단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과연 마가는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 의식했을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살피는 두 가지 방법론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친 베드로 복음서, 둘째는 바울 복음서라는 입장입니다. 통설은 친 베드로 복음서로 보는 견해입니다. 초대교회 형성사에서 베드로와 마가 관계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만찬을 나눴던 다락방이 어디겠습니까? 그곳은 또한 초대교회 발상지인 다락방 기도회 자리이기도 합니다. 허다한 가정교회 단위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모습입니다(행 12:12). 그러니 베드로가 마가를 아꼈다고 봄이 자연스럽습니다.
마가는 아버지뻘인 베드로에게서 예수님 행적을 이모저모 듣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에게서 직접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러니 마가만큼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이도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복음은 베드로를 대신한 복음서란 별칭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이지만 사실은 베드로 복음이기도 합니다.
자, 문제는 베드로가 아닌 바울 복음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바울 복음 보완책으로 보자는 주장입니다. 바울 복음을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고난이 중심축입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바울 복음은 고난보다는 부활에 맞춰집니다. 십자가와 부활, 곧 고난과 영광이 바울 복음 핵심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그 강조점은 결국 부활에 맞춰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 복음을 압축한 어의(語義)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바울 복음에서 고난은 아쉬운 여운이 남습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활이 압도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울 복음을 다른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바울이 이해한 그리스도는 어떻습니까? 그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행 9:3). 그러니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은 언제나 부활과 직결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 아쉬운 부분을 간파했습니까? 훗날 바울 전도팀에 재합류하게 된 마가입니다(딤후 4:11, 몬 1:24). 만약 마가복음을 바울 복음 보완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그 일을 순기능으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깊이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 회개와 성찰 위에 바울 복음을 보완할 복음서를 기록합니다. 그렇게 고난이 강조된 마가복음을 또박또박 기록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사도행전(1:4)과 달리 "갈릴리"를 강조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